* 본 리뷰에 쓰인 인칭은 더빙판을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 워낙 오래 전 나온 작품이다보니 그냥 대놓고 스포일러 막 내지르고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BGM IS Der Nussknacker Blumenwalzer(호두까기 인형 2막 2장 4악장, 꽃의 왈츠

[번역에 따라 '꽃의 요정의 춤'이라고도 한다. 같은 곡이다.])


시작하며, 

2002년 8월 방영된 애니를 2016년에 보는 기분은 묘하다. 14년 전 애니다보니 기술력이야 당연히 눈을 낮춰야 하고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스토리텔링'이 지금 시대에도 먹히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하는데 프린세스 츄츄는 그게 먹힌 애니였다. 솔직히 지금 양산형으로 나오는 이세계 라이트노벨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걸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스탭롤에는 분명 등장인물 대다수가 히라가나지만 아무리 봐도 애들 보라고 만든 애니메이션은 아닌, 2002년 작품 프린세스 츄츄의 리뷰.




1. 한 남자가 죽었습니다.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남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만드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것을 알게 되고, 귀족도, 부자도 모두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써주기를 그 남자에게 부탁했다.

그 남자는 그들을 위한 이야기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내 그 남자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양 팔을 도끼로 내려쳐 잘라내었다.

그 남자는 얼마 후 죽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이야기는 죽고 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현실과 이야기가 뒤섞이기 시작해, 어느새 구분이 없어졌다.


프린세스 츄츄의 무대는 뱀이 교복을 입고 발레 수업을 듣던지, 개미햩기가 이족보행을 하면서 발레 수업을 듣던지(넌 왜?!), 염소가 선생님으로 있다던지 하는 이상한 세계이다. 1화에서 아오리가 이상하게 느끼다가도 이내 수긍하는 것은, 아오리 또한 그 남자, 드롯셀마이어가 만든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파키아의 능력이 각성하면서, 또 그의 숨겨진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 애니는 결코 애들 보라고 만든 애니가 아니게 된다. 이 얘기는 조금 더 뒤에서 하고.


액자식 구성이라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드롯셀마이어는 이야기의 창조자이자 지배자로 군림함과 동시에 그 등장인물인 아오리, 파키아, 루는 드롯셀마이어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심지어 이야기의 창조자임을 알게 되는 몇 안되는 등장인물들이다. 반대로 드롯셀마이어 또한 창조자이기 때문에 <프린세스 츄츄>가 있는 세계관에 개입하기도 한다. 제 4의 벽을 마구잡이로 뛰어넘기는 전개는 일반적인 동화의 전개와는 사뭇 다르다. 드롯셀마이어는 분명 <프린세스 츄츄>가, 아오리가 있는 세계에서 죽은 지 오래된 인물인데, 정작 드롯셀마이어는 팔도 멀쩡하고 잘만 개입한다. 굳이 표현한다면 제 4의 벽을 마구잡이로 넘어드는 3개의 액자식 구성이다. (동화책 <왕자와 까마귀> - 왕자와 까마귀에 나오는 프린세스 츄츄가 실존하는 세계(주 무대, 이하 '츄츄의 세계'로 명칭을 통일.) - 드롯셀마이어 시점의 세계)


옛날에 분명 죽었다던 드롯셀마이어는 어떻게 프린세스 츄츄가 있는 세계 바깥에서 창조자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의 존재는 프린세스 츄츄라는 이야기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동화를 모티브로 한 세계관은 뻔하게 흘러가지 않고, 때때로 변칙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2. 프린세스 츄츄

아오리가 변신할 수 있는 백조, 아 그러니까 진짜 백조는 아니고 프리마돈나. 하지만 <프린세스 츄츄>의 이야기 속에서 그 누구도 하고 싶지 않았던 배역. 평범한 오리였던 아오리가 드롯셀마이어에게 선택당해 입혀진 '희망'. 그리고 그 힘으로 마음을 잃어버린 왕자를 구할 수 있는 공주.


1부 <알의 장>에서 프린세스 츄츄는 왕자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배역이지만, 2부 <아기 오리의 장>에서 프린세스 츄츄는 스스로의 힘에 무력함을 느끼기 일쑤이다. 1부가 일반적인 동화에서 주인공이 겪는 고난 정도라고 치면, 2부에서는 그 깊이가 바닥을 뚫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프린세스 츄츄라는 배역이 왜 아무도 하고 싶지 않았던 배역인 게 점점 드러나는데


1. 프린세스 츄츄는 왕자에게 말로(말이다. 다른 건 괜찮다.) 사랑한다 고백할 수 없다. 고백하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2. 프린세스 츄츄는 왕자를 행복하게 해줄 뿐, 츄츄와 왕자가 같이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없다.

3. 프린세스 츄츄로 선택되어 받은 펜던트는 왕자의 마음 파편 중 마지막 하나로, 돌려주게 되면 인간으로도 변할 수 없다.


야 진짜 변태적이다. 드롯셀마이어 진짜 변태적일세.


왕자만을 바라보고 숭고히 희생한 프린세스의 끝은 다시 오리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동화 속에서 얼마 비중도 되지 않았던 오리는 최선을 다해 프린세스 츄츄로써의 임무를 수행한다. 더 이상 인간으로 변신할 수 없게 되고, 오리로 돌아온 뒤에도 말이다.



3. 알의 장, 아기 오리의 장

1화부터 13화까지는 알의 장, 14화부터 26화까지는 아기 오리의 장으로 따로 분류가 되어 있는데, 원안을 쓴 스태프는 10년 전부터 알의 장을 구상해왔었다 한다. 그걸 보고 13화까지 쭉 달리면 자잘한 고증오류(?)는 무시해도 될 정도로 알의 장의 완성도가 높은 편인데, 14화부터 그 자잘한 고증오류들이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전개가 된다. 깔끔하게 모든 떡밥을 회수해서 풀어나가는 것이 아기 오리의 장인데, 여기서 주연 4인의 위치는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이야기를 뒤틀어버림으로써 왕자를 지키는 기사의 역할을 해야만 하던 파키아가 드롯셀마이어의 후손인 것이 밝혀지며 '츄츄의 세계'의 엔딩을 쓸 수 있는 이야기 속 작가로 변하고, 프린세스 클레르였던 루는 큰까마귀의 계략에 속아 넘어갔던 평범한 소녀였으며, 마음을 잃어버렸다 어느 정도 수복했는데 큰까마귀의 계략에 넘어가 적이 되버리는 뮤토까지. 아오리는 되려 이 넷 중에서 제일 변화가 덜한 거 같기도 하다. 파키아는 아오리에 대한 태도의 변화까지 감안해야 하니 이 녀석이 제일 포지션 변화가 큰 편인데, 드롯셀마이어의 뒤틀린 이야기를 이어나갈 작가 포지션까지 떠안았으니 제 후손이 그렇게까지 이야기 속에서 버둥거리며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는 드롯셀마이어의 당황함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창조주랍시고 행패(?) 부리는 건 역시 별로지만.



4. 동화, 그리고 발레

작품 자체가 별로 돈이 안 쓰였을 거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클래식 악곡들이 많이 쓰여서 꽤 돈 썼을 법한 애니이다. 각 화마다 부제가 붙어있는데, 클래식 계열을 잘 아는 이라면 곡의 제목을 유추해서 이 캐릭터는 이런 역할이구나, 이번 화는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 발레라는 춤이 우아하기로는 대명사이지만 이것도 집중이 됐다가 발레와는 접점이 없는 사람이 중간에 잘 집중해서 보다가 빵 터지는 자세가 가끔 나온다. 웃을 부분이 아닌데 갑자기 터져서 집중하기 좀 어려웠다.


무엇보다 츄츄는 변신을 해서 적을 물리친다가 아니라 변신을 해서 춤으로 정화시킨다는 개념이 좀 더 맞는 편이고, 그 이전에 변신도 애초에 큰 의미를 두기 힘들다. 특히 2쿨에 진입하면 되려 아오리에게 있어서 츄츄란 족쇄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다시 말하지만 드롯셀마이어는 핵변태다.


기존의 동화는 꼬아버리고, 발레는 되려 적절한 요소에 배치한 작품이라 발레덕후, 클래식덕후들에게 어필 꽤나 했지 않았을까 싶다. 난 정작 돌려보다가 중간부분 잠깐 스쳐지나간 거 보고 이거 뭐 이런 애니가 다 있어? 했었는데.... 1화부터 봤으면 안그랬을지도.



5. 간단히 말하자면, 서브커플이 주인공이 된 작품

이렇게 어려운 말들이 잔뜩 쓰여져 있지만 주인공은 끝내 해피엔딩을 맞지 못한 채 루와 뮤토를 이어주고 다시 오리로 돌아간다. 새드엔딩이라기도 그렇다고 해피엔딩이라고도 할 수 없는데, 엔딩까지 보고 난 뒤 난 이 애니를 설명 할 때 <드라마에 존재하는 서브커플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메인커플을 이어주려고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해주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드롯셀마이어가 '츄츄의 세계' 세계관 안에 설정한 동화 <왕자와 까마귀>의 주인공은 뮤토와 츄츄가 됐어야 하지만 루가 츄츄의 역할을 대신했고, 왕자와 이어지는 것도 츄츄가 아니라 클레르이다. 츄츄는 <왕자와 까마귀> 내에서도 큰 비중이 없고 주인공도 아닌 데다가, 츄츄의 세계에서도 주인공이라고 하기 어렵다. 드롯셀마이어가 보는 시점, 즉 드롯셀마이어마저도 관찰자로 보는 애니메이션 <프린세스 츄츄>를 보는 시청자 시점까지 와서야 아오리 = 프린세스 츄츄는 주인공이 된다. 어렵게 쓴 거 같지만 이게 그나마 풀어 쓴 거라 어떻게 쉽게 줄일 수가 없다.


이쯤에서 파키아의 심정이 궁금해진다. 아무리 봐도 2쿨 돌입하고는 아오리를 의식 안할 래야 안할 수가 없는 시점이 되는데, 아오리의 마음이 어떤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되려 크게 표현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렇게 의식하던 아오리가 오리로 돌아갔을 때의 절망감은 분명 컸을텐데도, 25화의 묘사를 보면 이미 그 역시 드롯셀마이어의 이야기 내에서 그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드롯셀마이어가 쓰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를 자신이 이어나갈 수 있다는 마음 때문에인지 절망하지 않는다. 유리멘탈에서 강철멘탈로 진화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메인커플인 루와 뮤토는 다른 세계에 와서 깽판치고 지들만 행복하겠다고 지들만 잘 살겠다고 도망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 왜 거기서 나와서 아오리를 그 꼴로 만드냐ㅠㅠㅠㅠ



끝내며, 그리고 한 남자가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루와 뮤토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 아오리도 프린세스 츄츄로써의 사명을 다한 채 다시 오리로 돌아갔지만 파키아만이 여전히 <프린세스 츄츄>가 현존하던 세계에 홀로 남게 된다. 드롯셀마이어의 후손으로써 사람들에게 저주와도 같았던 <이야기를 현실로 구현하는 능력> 또한 각성했고, 기사에서 작가로 바뀐 파키아는 자신의 선조인 드롯셀마이어와는 다른 희망이 넘치는 이야기를 막 시작한 것으로 프린세스 츄츄가 끝을 맺는다.


드롯셀마이어의 이야기에서, 파키아는 유일하게 남은 변수일 것이다. 하지만 드롯셀마이어자 죽고 피로 <프린세스 츄츄>의 이야기를 쓰던 기계는 그의 손에 박살나버렸고, 더 이상 드롯셀마이어는 자신의 피조물인 파키아를 막을 수 없게 되자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떠난다. 자신도 어느 누군가의 <피조물>은 아니었나 하는 말을 남긴 채.



주인공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다한 채 돌아온, 어찌보면 가엾은 엔딩. 하지만 츄츄의 세계를 만든 드롯셀마이어는 사라졌고, 파키아가 남아 츄츄의 세계를 이어나갈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 엔딩이라 언젠가는 다시 프린세스 츄츄 = 아오리를 만나지 않았을까.